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정부/평가/긍정적 평가 (문단 편집) ==== 연료림 조성 사업 ==== 박정희 정부 이전 [[이승만 정부]]의 산림정책은 산림황폐지의 복구의 사방사업에 치중하였으나 사회 · 경제적 요인과 사후 관리의 부진으로 복구성과는 미미하였고 부족한 재원으로서 목재연료가 소비되며 오히려 황폐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박정희 군부는 5월 20일 '5대 사회악' 척결 발표에 5대 사회악 중 도벌을 포함하며 불법 도벌업자를 사회의 송충이로 규정하며 엄벌을 시사했고, 이후 적극적으로 산림녹화를 위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법제적인 개혁을 시도하여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졌다. 1961년 6월에는 「임산물단속에 관한 법률」[[https://www.law.go.kr/%EB%B2%95%EB%A0%B9/%EC%9E%84%EC%82%B0%EB%AC%BC%EB%8B%A8%EC%86%8D%EC%97%90%EA%B4%80%ED%95%9C%EB%B2%95%EB%A5%A0/(00635,19610627)|#]]을 제정하여 모든 형태의 벌목을 법적으로 금지하여 산림보호를 기했으며, 동년 12월에는 국내 최초의 산림 관련 기본 법률인 「산림법」[* 도벌 엄벌 조항이 있었고, 농민들에게 연료림 조성의 의무를 부여했으며, 조림사업에 산림조합을 결성하여 산림계를 통한 인력동원 방안을 마련했다.][[https://www.law.go.kr/%EB%B2%95%EB%A0%B9/%EC%82%B0%EB%A6%BC%EB%B2%95/(00881,19611227)|#]]을 제정했다. 1962년 1월 에는 「사방사업법」[[https://www.law.go.kr/%EB%B2%95%EB%A0%B9/%EC%82%AC%EB%B0%A9%EC%82%AC%EC%97%85%EB%B2%95/(19620115,00977,19620115)|#]][* 요사방지를 재조사한 결과 37만㏊의 황폐지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어, 1962년 가을부터 1963년까지 황폐지 복구를 완결할 계획을 세웠다.]을 제정하고 녹화 방법과 재원 조달의 수단을 구체화했다. 또한 본격적으로 항공사진에 의한 산림조사사업이 착수되었으며, 산림의 계획적인 경영을 위해 산림계획제도를 도입하여, ‘치산7개년 계획(1965~1971)’을 별도로 수립하여 계획물량은 연료림 412천㏊, 용재림 332천㏊, 죽림 2천㏊, 특용수 34천㏊, 개량포플러 222천㏊ 계획했다. 1967년에는 당시 농림부 산림국이었던 산림행정조직을 독자적인 외청으로서 산림청으로 발족했다. 이전 이승만 정부는 1959년 연료림 조성 5개년계획을 세워 농촌연료를 공급할 계획을 세웠으나, 성과가 미비하여, 정부는 종자자금 조차 보조할 형편이 되지 않아 사업은 도중에 중단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1962년 산림법을 제정하여 농민들에게 연료림 조성 의무를 부과하였고, 1961~1967년 산림청이 발족되기 전 본격적인 치산녹사사업의 이전 정비기 동안 오리 나무, 리기다수 소나무, 특히 [[아카시아]]로 대표되는 생장이 빠르고 수명이 짧은 속성수의 조림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1965년에는 연료림 단기 조성사업 계획을(1965~1969)[[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1855&pageFlag=&sitePage=1-2-1#|#]] 세워 강력하게 추진하여 단 4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막대한 연료림을 조성하였는데, 특히 1967년은 산림청의 발족과 함께 현재까지 대한민국 임업행정 사상 조림을 가장 많이 한 해로서, 국유림 15,500㏊와 민유림 439,279㏊를 합하여 총 454,779㏊를 식재하였다. 이것은 조림사업을 범국민운동으로 추진하여 정부 각 기관, 군인, 각급 단체, 학교 및 마을 산림계원이 총동원되어 수행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였고, 이 시기 대부분의 조림은 속성수 위주의 연료림 조성 사업 위주로 추진되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조성된 연료림은 산림황폐의 주원인이 되었던 구공탄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전까지 무분별한 임산 목재연료의 채취를 막아주었고 그외에도 다방면에서 농촌의 연료로서 기능했다. 특히 아카시아 나무는 영양분이 충분한 잎으로 녹사료는 토끼나, 염소 먹이로서 활용되었고, 아카시아 꿀은 농촌에 새로운 수입원을 가져다 주었으며, 참나무보다 3배 이상 빨리 자라며 4년만에 조림조성이 가능하고 내구성이 우수한 아카시아 연료림은 우마차, 트럭상판 등 목재의 역할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그외에도 뿌리과 식물로서 스스로 질소 비료를 만들어 토양을 오히려 비옥하게 했기에 척박지 조림용과 왕성한 뿌리로 황폐지의 토사 유출을 방지하여 대대적인 사방사업에 있어서도 큰 기반이 되었다. 향후 70년대 절대 녹화기의 치산녹화사업과 대대적인 사방사업의 성공적인 이행에 있어 이는 탄탄한 기반으로서 자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